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버트 E. 리 (문단 편집) === 북군에게 무릎을 꿇다 === 다만 이러는 동안 리의 병력도 그랜트의 엄청난 뚝심과 끈질기게 보급로를 노리는 전술 덕분에 차근차근 소모되고 지쳐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리가 그랜트를 상대하는 사이에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 무수한 약탈과 파괴를 통해 서부전선을 완전히 박살내버렸고, 전쟁 내내 탈영병이 없기로 유명했던 리의 군대에서도 서부전선 출신의 병사들이 탈영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반 년이 넘게 피터스버그 주변에서 장기전을 벌인 탓에 부상병이 누적되고 질병이 번지기 시작했는데 식량과 무기를 비롯한 각종 보급은 오히려 부족해지고 있었다. 반면 북군은 남군보다 피해는 컸지만 엄청난 보급능력 덕분에 병력이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처음 피터스버그 전투를 시작한 북군은 10만을 살짝 웃도는 수준이었는데, 9개월 동안 리가 입힌 피해보다 북군에 보충되는 병력이 더 많았기 때문에 농성 후기의 북군은 12만 5천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여기에 셰리던 장군이 이끄는 5만 가량의 추가병력이 머지않아 합류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으며, 보다 더 장기적으로 본다면 서부전선을 박살내고 돌아오는 셔먼의 군세까지 고려해야 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리는 북군의 공격계획을 방해하기 위해서 1865년 3월 말 일부 병력을 돌려 스텟먼 요새(Fort Stedman)를 공격하여 북군에게 한 차례 피해를 입힌 다음 철수할 계획을 짰는데, 요새는 쉽게 함락시켰지만 그동안 굶주려있던 남군병력들이 함락시킨 요새에 남아있던 식량을 주워먹느라(...) 빠질 타이밍을 놓쳐버렸고, 그 사이에 4천명의 북군이 우회기동으로 요새를 도로 함락시킨 뒤 철수 중이던 남군을 패퇴시켜버렸다. 북군의 공세는 이 공격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요새 공격을 위해서 나눈 병력이 패한 남군 쪽의 방어가 취약해졌다. 더이상 견디지 못한 리는 4월 2일, 만신창이가 된 북버지니아군을 이끌고 피터스버그를 탈출했고, 바로 다음 날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되었다. 리는 전임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존스턴이 이끄는 남부의 잔존전력과 합류하기 위해 노스캐롤라이나로 이동하려 했으나 포토맥군에게 퇴로가 차단되고 포위되었다. 인원이 겨우 8명에 불과한 여단이 있을 정도로 심하게 소모된 북버지니아군은 전체 병력이 도합 겨우 1만 5천에 지나지 않았고, 12만 5천의 포토맥군을 상대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리는 5년 동안 자신과 함께 싸우고 살아남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그랜트에게 항복하였다. 리가 항복할 당시 장병들에게 남긴 고별사(일반명령 9호)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능가할 자가 없는 용기와 인내로 지난 4년간 복무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불굴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북버지니아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자원 앞에서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굴복에 동의한 이유가 그처럼 많은 전투를 겪으며 마지막까지 견실하게 지탱해 준 용사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님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전투를 계속함으로써 발생할 손실을 보상할 용기가 없습니다. 더 이상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껴 나는 무익한 희생을 피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용감했으며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종전협정에 의거하여 장병은 포로교환이 이루어질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 머무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임무를 성실하게 완수했다는 만족감을 항상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축복과 가호가 여러분과 함께할 것을 열심히 기도합니다. 조국에 대한 여러분의 충성과 공헌을 존경하는 마음과 여러분의 친절과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사랑에 넘치는 고별 인사를 보냅니다.' 항복하기 위해 그랜트 장군을 찾아갔을 당시 둘은 서로에 대한 악감정도 없었고 오히려 호감을 느껴 제법 사이좋게 대화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남북전쟁 내내 양군 장교들 간에 그닥 악감정은 없는 편이었다. 정치인 출신 장교는 몰라도 정규군 출신 장교끼리는 한두 다리 건너면 다들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랜트와 리도 기수 차이는 꽤 나지만 육사 선후배 사이였다.] 그랜트는 동포끼리의 싸움에서 수치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며 남부가 연방의 품으로 돌아와 '''하나의 미합중국이 완성되는 것'''만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남부 군인들 개개인에 대해서도 식량을 나누어주겠다고 하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갈 때 장교는 명예의 상징인 검을 휴대하고, 병사는 농사에 필요할 말을 타고 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심지어 승리한 북군 병사들이 남군 병사들을 조롱하는 것조차 금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